종교 개혁에 대한 교황권의 반응

16세기부터 지금까지

개혁자들의 성경적 믿음에 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된 반응은 반종교 개혁이다. 반종교 개혁은 예수회의 정치적 그리고 교육적 영향을 통해 진척되었다. 예수회는 1530년에 로욜라의 그나티우스[1]에 의해 창설되었고, 창설된지 약 10년 후에 교황 바울 3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예수회는 조금도 타협이 없는 호전적인 자세로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개혁 전의 상태로 복구하는 운동을 이끌었다. 이그나티우스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목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과 일반인들이 무조건 로마 카톨릭 교회에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취한 주요 작전은 성경을 믿는 신자들의 자녀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예수회 사람 중에 몇몇을 골라 다양한 기술과 전공에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하였다. 그들은 해당 분야에서 뛰어났기 때문에 각 나라의 왕들과 통치자들 및 세력있는 가문의 가정 교사 및 선생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과거처럼 각 국가들을 교황 로마에 다시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처럼 종교 개혁이 많이 성공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로마 카톨릭이 그 나라와 백성들의 지도층을 휘어 잡도록 도왔다. 그러나 폴란드 같이 종교 개혁이 학교와 대학을 세운 다른 나라들에서는  가차없이 이미 세워진 모든 것들을 파괴시켰다. 이 작전은 그 때에도 성공적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사설 카톨릭 학교나 대학에 보내면 그 자녀들은 그곳에서 카톨릭 교육을 받게 된다. 이런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이 카톨릭 신자가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회의 목적은 대중들에게 카톨릭 사상을 주입시키는 것이다. 이 일을 이루는데 있어서 그들은 공개적으로 카톨릭 교리를 가르치기 보다는 삶의 모든 중요한 문제들을 로마 카톨릭 기준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적용하는 방법을 택한다. 따라서 예수회 활동으로 인해 카톨릭 관점은 언제나 우세하였고 사람들 사이에서 장려되었다. 지금과 같은 카톨릭과의 ‘대화’ 시대도 마찬가지다. 최근 이머전트 교회 운동 지도자들은 카톨릭의 관점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더욱이 학생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카톨릭 훈련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덜 효과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그나티우스가 사람들을 카톨릭 교회로 이끌기 위해 사용한 또 다른 수단은 자기 수련과 절제 훈련을 위해 만들어진 멋진 프로그램들이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책 『영적 연습(Spiritual Exercises)』은 어떻게 자신을 완벽하게 부인하여 하나님과의 신비한 연합에 이를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가르친다. 그가 제시하는 자기-부인과 신비 체험은 그가 의도한대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로마 교회에게 온전하게 순종하도록 하였다. 성경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대중들은 어쩔 수 없이 미신적일 수 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및 주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신비주의에 쉽게 빠져든다. 특히 미래에 대해 불투명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영적 어둠 가운데 방황하는 사람들이 안정을 원할 때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들에게 교황의 영적 권위와 가시적 의식들을 제시한다. 사람들이 영적 진리를 필요로 할 때는 그들을 미혹할 황홀한 신비 체험을 권한다. 참으로 간교한 마귀의 계략이라 하겠다.

17세기 중엽 즈음에 예수회는 유럽 전반에 걸쳐 수천명의 회원들을 모집했다. 그들의 사명은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 개혁의 결실들을 근절하는 것이다. 예수회 회원들은 그때부터 19세기까지 약 200년 동안 교황의 가장 강력한 힘이 되어 서구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예수회는 카톨릭 군주들과 함께 힘을 모아 유럽 전반에 강력한 정치적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400년 동안 교황의 권위를 지지하였으며 성례 시스템을 복구하였고, 종교 개혁의 성경적인 원칙을 접하게 된 많은 나라들에게 미신적인 신비주의를 장려함으로써 가장 주된 반개혁 운동을 펼쳐왔다. 종교 개혁 이후 지금까지 교황 교회가 이룬 업적들 중에 많은 부분이 예수회의 계획과 전략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이다.

현대 세계에 맞추기 위해 내부적으로 재조직된 교황권

1798년, 교황의 세력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폴레옹의 군대의 장군 하나가 바티칸에 들어가 교황 비오 4세를 성좌에서 몰아낸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은 완전하게 파멸되었으며 교황의 권력은 뿌리채 뽑혔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멸망 가운데서 일어났던 것처럼 신성 로마 제국의 몰락 가운데서도 교황권은 계속 존속했다. 그러나 과거에 누렸던 지울 수 없는 권력과 영화로 인한 기억 때문에 세계를 통치하려는 교황권의 야망은 변함없이 확고하여졌다. 다음 사건의 기록은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가장 오래 집권했던 교황 중에 한 사람은 교황 비오 9세(1846-1878)다. 그는 유럽에 민족주의가 일어나는 때에 집권했다. 교황의 강렬한 소원과는 정반대로 1849년에 이탈리아 공화국이 탄생했다. 그 나라 안에서 교황은 땅도, 권력도 차지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오 9세는 과거의 권력과 영광을 지닌 교황권을 다시 세워보려 노력했다. 이를 위한 중요 전략은 교황 무오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어처구니 없는 내용이며 또한 이단적인 교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1870년에 선포한 교황 무오설은 바티칸의 구속력을 지난 교리가 되었다. 로마 카톨릭 역사가인 돌링거와 버나드 해슬러가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교황 무오설은 성경 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 전통에도 없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리는 공식적으로 공포되었고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을 무한하게 더해 주었다. 제 1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해 가장 큰 변화 중에 하나는 그때까지 유럽 교구 내에서 자체로 뽑던 주교를 이제 교황이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대주교와 추기경들이 주교들 가운데 피선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변화는 교황 한 사람과 그의 하숫꾼들의 손에 더욱 강한 중앙 권력을 쥐어주게 되었다. 그의 다음 계승자 비오 10세는 로마 카톨릭 법을 재조정하여 1917년 교회 법전(Code of Canon Law)를  만들었으며 이 법전은 교황 권력의 내부 중앙화를 더욱 구체화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현대 시민 국가가 되다

1929년, 무솔리니는 교황 비오 11세와 라테란 조약을 맺고 공식적으로 바티칸 언덕을 교황에게 양도했다. 따라서 교황청이 입었던 상처는 치유되기 시작했으며 교황청은 다시 시민 국가의 권력을 잡게 되었다. 교황청이 무솔리니와의 맺은 법적 협정은 교황청이 맺은 여러 많은 민정  협정 중에 하나다. 가장 악하기로 유명한 협정 중에 하나는 교황 비오 12세와 아돌프 히틀러와의 협정이다. 교황권은 다시 권력을 든든하게 세우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로는 1917년 교회 법전으로 하였고 외부적으로는 많은 국가들과 법적 협정을 통해 이루어갔다. 따라서 바티칸은 세계 전반에 걸친 대부분의 나라 내 “제 5항” 부분에 카톨릭 시민을 두며 또한 많은 나라들의 정부와의 시민 협정을 수단으로 하여 이중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각각의 카톨릭 교인들은 성경의 최고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또한 복음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에 대한 두려움 가운데 덫에 걸린다. 대신 각 교인들은 무엇보다 먼저 “거룩한 교회 어머니”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따라서 교황은 자신에게 철저하게 순종하는 교인들을 통해 각 나라의 내정 사건들 위에서 정치적으로 조종할 수 있다. 그 예가 19세기의 영국의 옥스포드 운동이다.

영국 교회에 대한 옥스포드 운동의 교활한 공격

수세기 동안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견고히 서 왔던 개신교 개혁주의 믿음은 19세기가 되면서 개신교의 원수로 맹세한 예수회에 굴복하고 만다. 1829년, 카톨릭 해방령에 의해 예수회가 영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 결과로 1833년에 영국에서는 옥스포드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존 헨리 뉴먼이다. 뉴먼 자신의 간증에 의하면 그의 주요 목적은 영국 국교를 로마 카톨릭과 구별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카톨릭 교회가 그에게 맡긴 일을 영국 교회 내에서 그대로 이루어냈다. 그는 수 없이 많은 책자들을 통해 성경과 역사를 왜곡하였으며 결국 개신교가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제시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으로 주장하였다. 뉴먼의 성경 왜곡은 군중들을 성공회의 의식주의 및 로마 카톨릭으로 편향하게 하였다. 결국 그는 성공회를 떠나 로마 카톨릭 신자가 되었다.

뉴먼의 영향력을 통해 영국 교회 내에는 성공회-카톨릭 연합으로 알려진 단체가 설립되었다. 성공회-카톨릭 연합 운동은 영국 국교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계속 교황 로마(Papal Rome)의 노예로 전락하였다. 예수회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성경적인 신자들을 조금씩 카톨릭의 굴레로 끌여들어오는 것이다. 예수회가 영국 국교에 침투해 들어갔다는 사실은 영국의 주도권을 카톨릭 굴레로 들어오게 하는 공격 과정에 있어서 한 단계 전진하였다는 뜻이 된다.

미래주의(The Futurism)가 교황 로마를 수용하도록 하는 길을 예비하다

19세기의 교황의 야망은 또 다른 전선에서 성경적인 신자들 사이로 파고 들어갔다. 17세기에 예수회원 마누엘 라쿤자가 이뤄 놓은 수고가 19세기에 신속하게 번영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형제단(The Brethren)이 그의 가르침을 크게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형제단은 1827년 아일랜드 더불린에서 형성된 종교 단체다. 그 단체의 창설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존 넬슨 다비는 남부 더불린의 성경 예언 모임에 참석하게 된다. 그 모임에서는 “불법의 아들” 적그리스도에 대한 주제 및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기 전의 1260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토론하였다. 형제단은 미래 사건들을 예언하는 책자를 출판하는데 있어서 옥스포드 운동을 훨씬 능가했다. 이렇게 하여 2세기 전 예수회의 반개혁 운동에 의해 주입된 미래파의 싹이 힘을 얻고 자라났다. 존 헨리 뉴먼과 존 넬슨 다비는 사실 예수회의 미래지향적 노력을 복음주의 세계로 괄목할만하게 끌어들여온 장본인들이다. 특히 예수회의 로버트 벨라민 추기경, 프랜시스코 리베라, 마누엘 라쿤자의 노력들이 꽃을 피었다. 이들 예수회 회원들은 계시록의 대부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 직전의 문자적 3년 반을 다루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뉴먼, 다비, 그리고 그들의 제자들은 이 가르침을 따랐다. 역사적 성경 해석은 교황의 자리가 적그리스도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지만 형제단과 스코필드 주석 성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 자들은 역사적 성경 해석을 버리고 미래주의에 속아 미래주의를 붙들게 되었다. 1909년에 처음으로 선보인 스코필드 주석 성경은 1917년에 개정되었으며 그 성경은 미래주의를 장려하는 가장 중요한 모체가 되었다. 계시록에 대한 스코필드 성경 주석은 많은 근본주의자들에게 미래 사건의 일정을 위한 주요 자료가 되어 왔다. 스코필드 성경에 의하면 교회 시대는 괄호로 여겨진다. 그후 미래주의자들의 믿음은 핼 린지와 같은 종교 저자들에 의해 대중화되었다. 따라서 옥스포드 운동 및 여러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그 정체를 드러낸 스코필드의 미래주의는 역사적 성경 해석을 심각하게 대치하면서 영어 성경 신자들을 무너뜨려 로마로 돌아가게 하고 있다. 미래주의의 가르침은 예수회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지금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적그리스도를 효과적으로 감추고 있다.

전쟁과 음모를 통한 현대적 잔악 행위

20세기의 로마는 각 나라의 정부 지도자들 위에 권세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바티칸은 여러 나라들과 동맹을 맺는다. 로마 카톨릭과 동맹을 맺은 독재자들의 일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1922-1943년까지 이탈리아 베니토 무솔리니, 1933-1945년까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1936-1975년까지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1932-1968년까지 포르투갈의 안토니오 살라자르, 1946-1955년까지 아르젠티나의 후안 페론 등이다. 아마 이들 중 가장 잔인하고 살벌했던 독재자는 1941-1945년까지 집권한 크로아티아의 안톤 파블릭일 것이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에서 영아 세례를 받으며 카톨릭 신자가 되었다. 그는 성찬 및 제단의 복사(altar boy)였다. 그는 자살하여 죽는 날까지 카톨릭 신자였다. 히틀러와 바티칸의 협약서는 권력을 잡은 독재자가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협약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독일 내에 나치 운동을 장려하면서 동시에 카톨릭이 더욱 깊게 침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치 운동의 요새이며 본부는 독일 남부의 바바리아였는데 그 이유는 북부 독일은 개신교가 많았지만, 남부 독일은 거의 다가 카톨릭이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다 함께 나치당에 가입했다. 1942년 히틀러의 권력이 극에 달할 때 그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로마 카톨릭 대중 위에 군림했다. 카톨릭 교도들은 자신들의 종교 생활 가운데 독재주의적 정권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없이 쉽게 독재적인 정권을 지지하였다. 물론 로마 카톨릭의 평민들은 그들의 종교 지도자가 하는데로 그리고 시키는데로 따라 하면 되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히틀러의 정권을 공식적인 인정을 하기 전에도 이미 공공연히 히틀러를 칭송했으며, 또한 그는 1933년 히틀러 정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첫번째 국가(교황 로마)의 수반이었다.

바티칸은 나치 독일 및 여러 국가들과의 관계에 대한 자료들을 최근까지 숨겨오며 학자들에게 보여주기를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티칸 외부의 자료들은 교황청이 무솔리니와 히틀러 정권을 격려하고 지원하고 동조하면서 세계 2차 대전 중에 크로아티아에 독재 나라를 세운 것을 알려준다. 안톤 파블릭은 2차 세계 대전 중에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떼어진 새로운 크로아티아 나라의 수반이었다. 파블릭의 4년 집권 동안 그와 로마 카톨릭 고위 성직자 대주교 알로이스 스테피낙은 크로아티아에 사는 90만의 정교 세르비아인들, 유대인, 일반인 등을 향해 “개종 또는 죽음”이라는 정책을 추구했다. 그 결과 20만명이 개종했고, 70만명은 죽거나 고문을 당하거나 화형, 총살, 생매장되었다. 우스타쉬에 의해 집행된 이 끔찍한 학대는 전쟁의 극악무도함을 그대로 보여주었으며 수족의 절단은 소름끼쳤고 그 만행은 무시무시했다.

수세기의 종교 재판 때와는 달리 카톨릭 교회는 이 종교 전쟁의 사형 집행을 세상 권력에게 맡기지 않았다. 로마 교회 그 자체가 그 권력의 자리에 앉아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과감하게 행동했다. 특히 카톨릭 사제들은 단도와 도끼를 휘두르고 총을 쏘면서 대량 학살을 범하였고 다시 종교 재판을 열었다. 우스타쉬 장교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크로아티아의 승리”를 위해 “단도나 총으로” 싸우기로 맹세한 사제들 또는 탁발 수도승들이었다. 사제들은 정교회의 문을 닫거나 또는 정교회를 장악하는데 있어서 가장 현저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교회의 기록을 압류하고 정교 성직자들을 심문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들은 또한 정치범 수용소를 감시했으며 많은 희생자들의 고문을 계획했다. 일반적으로, 세상은 이러한 사실들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유고슬라비아에서 1990년에 있었던 발칸 전쟁 때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2차 세계대전때부터 바티칸에 의해 이끌려온 서부 나라들은 크로아티아를 독립적인 주권 국가로 인정해 왔기 때문에, 1990년에 크로아티아인들과 세르비아인들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방 국가들은 크로아티아인들 편에 섰다. 『선데이 전보』1991년 9월 호를 보면 저자 앤드류 로버트가 자신의 놀라움을 글에 담고 있다. “현재 위기 가운데 거의 모든 서부 소식통들은 크로아티아를 옹오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크로아티아 국기로서 우스타쉬의 체커(바둑판) 무늬 상징을 채택하기로 결정할 때 그 결정에 대한 세르비아인들의 반응이 어떠하길 기대하는가? 보스니아 크로아티안에서 세르비아인들을 도살할 때 프란시스코 수도사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을 잊는데는 크라이나에서 방영된 오늘의 45분 CNN 방송 보도 보다 오래 걸릴 것이다. 정교의 세르비아인들은 만일 그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하면 보호를 약속 받았지만 그렇지 않고 교회에 들어가면 사제들이 보는데서 죽게 되었었다.”[2]

세계 2차 대전 중에 국가 전체가 로마 카톨릭이었던 크로아티아 독립 국가의 탄생은 잔악무도한 핍박을 동반하고 있다는 역사적 사실이 아직까지 계속 무시되고 있는 사실은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다.

십자군 및 605년간의 종교 재판은 끝났다. 또한 바티칸과 로마 카톨릭 독재자들과의 동맹도 끝났다. 하지만 온 세계에 걸쳐 각 나라의 정권을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조정하며, 심지어 각 민족의 운명까지 결정할 만큼의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교황권의 엄청난 권세는 지금도 여전하다. 이제 교황청이 현재 “그 얼굴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알아 보도록 하자.

역사 다시 쓰기, 그리고 세상에서의 조작

첫째, 교황 로마는 “종교 재판”의 개념을 갱신하기 시작했다. 로마 카톨릭의 저자이며 신학자이고 과거에 사제였던 피터 드 로사는 약삭빠른 명칭 변화를 설명한다. 그의 책 『그리스도의 대리자, 교황직의 어둠의 면』에서 그는 명칭 변화에 대해 말한다.

“최근에 성 카톨릭과 사도적 심문에 대해 소련의 비밀 경찰같은 나쁜 이미지가 붙었다는 이유 때문에 한번 이상 그 명칭을 바꾸었다. 1908년, 심문을 위한 로마의 가장 오랜 성 모임(the Sacred Congregations)은 거룩한 사무소(the Holy Office)가 되었고, 1967년부터는 그 명칭을 다시 바꾸어 “믿음의 교리를 위한 모임”으로 하기로 하였다.”[3]

그 다음 교황청은 종교 재판의 이미지를 깨끗하게 없애기 위해 종교 재판 가운데 있었던 악행들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2000년 3월 12일, 교황 요한 바울 2세는 전세계를 향한 미사 가운데 과거 교회 회원들이 저질렀던 잘못들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우리가 앞 과에서 조사한 바와 같이 교회의 회원들이 악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교황들이 그 악들을 저지른 것이다. 교황들은 카톨릭을 반대하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세속 권력을 이용하여 종교 재판을 행하였다. 아무튼 명칭 변화 및 거짓 사과를 통해 교황 로마는 역사의 사실들을 뜯어 고치는 일을 시작했다.

몬트리올 대학에서 사회학 부교수인 장-가이 배일란코트는 카톨릭의 피상적 변화에 대한 글을 썼다. 종교 재판을 통해 이단들을 화형시킨 것과 십자군의 성전들(holy wars)은 “지난 봉건 시대 중에 교권 강요의 가장 극단적인 두개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라는 형식적인 언급을 한 후, 배일란코트는 자신의 뚜렷한 관찰을 언급하였다.

“1789년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가 더 이상 정부의 강압 권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교회 당국은 과거 협정을 통해 간직된 법들을 이용하여 각 국가의 법적 그리고 이념적 세력을 조종하는데 더욱 관심이 많아지게 되었다. 즉, 학교와 대학에서의 교육을 통해, 또는 병원이나 자선 단체 등과 같은 복지 서비스를 통해 그들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사실 카톨릭 교회는 계속적으로 한 국가가 확장하고 성장하는데 필요한 많은 기능들을 그 국가와 지도층에게 마련해 줄 수 있는 이상적인 기구가 되어 왔다. … 교회 내부에서는 주교들과 사제들이 각 개인의 자유를 버리고 중앙 조직의 기능이 되어 주었다.”[4]

그러므로 배일란코트가 지적한 것처럼, 교황권은 더 이상 자기들의 뜻을 펼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지는 못하게 되었어도 각 정부와의 협정을 통해, 또한 그들의 절대 법과 중앙 권력을 통해 평신도, 학교, 대학, 병원, 복지 서비스 기관들을 조절함으로써 그들의 강압을 계속 지속시켜 나가고 있다. 국가 법을 통한 교황 세력에 대해 많은 성경 신자들이 거의 무지하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많은 나라 가운데 국가 법을 통한 교황의 권력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제는 더 이상 군사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어도 카톨릭 법이 보여주는 것처럼 교황권은 사람들의 마음과 몸을 철저하게 다스리려는 야망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자 무엇보다 먼저 카톨릭 시스템 내부에 절대적인 법을 제정할 필요가 생겼다. 둘째, 각 나라의 정부가 카톨릭의 목적에 부응하도록 각 나라를 유혹할 필요가 있었다. 교황 교회는 교황 법정(the Holy See: 성좌)으로 알려진 정권이기 때문에 “협정”으로 불리는 외교적 동의에 의해 그 위치를 진척시켜 나갈 수 있었다.

“협정”은 관련 나라와 바티칸 사이의 국가 차원의 계약으로서 법적 구속력을 갖는다. 협정은 또한 계약 문서에 따른 권한이 주어진다. 예를 들어, 협정에 의해 국가 차원에서 로마 카톨릭을 교육하고 카톨릭 믿음을 권하는 것이다. 이때 카톨릭 교육은 그 국가의 모든 백성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되며, 경제에 대한 이해 (사회주의), 교회 재산에 대한 합의, 주교 선정, 결혼과 이혼 등, 여러 부분에서 카톨릭의 법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한 시민 법적인 이슈들이 국가 정부와 교황청간에 합의되는 것이다 (이때 교황의 성좌는 법적으로 주권국으로서 인정된다).

1989년 전까지는 교황 법정은 주로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의 나라들과 국제 계약을 맺었다. 바티칸과 “협정”이 맺어진 나라 안에서는 바티칸의 분명한 조종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아직까지 효력이 있는 비오 12세와 히틀러 사이의 독일 협정이 그러하다. 현재 다른 여러 나라들과 국가적 관계를 유지하려는 바티칸의 열망은 과거 그 어느때 보다 크다. 1950년부터 1999년까지 바티칸과 여러 국가들 간에 128개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9년마다 대략 로마와 여러 나라들 사이에 43개의 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심지어 중동의 나라들, 아시아, 아프리카도 로마와 법적 계약을 체결하는 중이다. 더욱이, 로마 사절단을 대사(ambassador)로 여기는 나라들에게 있어서는 로마 카톨릭은 그 국가의 국내 및 국제 법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교황 로마는 174개의 나라들과 대사관 수준에서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과 바티칸의 외교 관계는 1865년에 바티칸이 동맹국을 지지함으로 인해 깨어졌지만, 1984년 1월 10일, 레이건 대통령이 다시 교황 법정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설립하였다.

모든 나라들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길 원하는 바티칸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이란과의 관계를 추구하고 있다. 바티칸은 쿠바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 인해 중국, 한국, 베트남과 대단히 어려운 관계를 갖게 되었다. 한편, 이슬람의 주요 분파인 수니, 시아, 수피파의 138명의 이슬람 대 법률 학자(Grand Muftis)가 이슬람과 기독교 간의 평화와 이해를 주창한  2007년 10월 11일 이후에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2008년 3월 5일에 이슬람과 바티칸은 무슬림들과 함께 만든 “우리와 너희 사이에 공통 단어”라고 불리는 문서에 기초하여 새 세계 무슬림-카톨릭 포럼을 함께 열기로 동의하였다. 2008년 11월 6일, 처음으로 무슬림-카톨릭 포럼이 3일간 열렸다. 제니트 카톨릭 웹 사이트에 의하면, 이는 “중요한 발걸음을 내딘 것이었다. 바티칸 출판 사무실의 예수교 신부 페데리코 롬바디는 이러한 주장을 하였다….”[5] 이 포럼은 이슬람 나라들이 바티칸과 협정을 계약하는 길을 터 주었다. 전 세계적으로 10억 이상이 되는  이슬람 백성들은 그 크기에 있어서 거의 로마 카톨릭과 쌍벽을 이룬다. 소위 영적 대화에 의해 연합된 교황권과 이슬람은 앞으로 무슬림 나라들 및 비무슬림 국가들 내의 무슬림 법률 학자들과 정권 합의를 갖게 될텐데 그때 즈음이면 그 세력은 엄청날 것이다.

각 정부 내의 여러 로마 카톨릭 대표자들를 통해, 또는 협정을 통한 내정 간섭을 통해 교황 로마는 이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정부 지도자들과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게 되었다. 교황권은 많은 국가들과의 법적 협정 및 대사들을 통해 각 나라들을 조종하면서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붉은 빛 짐승을 탄 여자” (계 17:3)로 드러나고 있다. 교황 교회, 즉 여자는 붉은 빛 짐승, 곧 정권 위에 앉아있다. 교황 교회는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그들이 타고 있는 정권을 조종하고 이끈다. 배교 로마의 영적 조종에 굴복하는 정치적 정권은 결국 로마 교황의 야망과 목적을 완성시키는데 필요한 교황의 도구일 뿐이다. 이는 교황 교회의 역사를 볼 떄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 책의 제 17과는 제2 바티칸 공회(1962-1965) 이후, 종교 통합을 통한 바티칸의 권력 확장을 점검한다. 우리는 1994년의 “제 1 차 복음주의 및 카톨릭의 연합”, 1997년 “제2차 복음주의 및 카톨릭의 연합” 이라고 불리는 동의서에 대해 비평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에서는 경제 정치을 통한 교황권의 발달을 연구하도록 하자.

경제 정치를 통한 권력과 교황 로마

교황 베데딕트 16세와 그의 바티칸 체계는 사유 재산은 개인적인 것이기 보다 모든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의 선임자 교황 요한 바울 2세는 “개인 소유는 사실 ‘사회적인 저당’ 하에 있는 것이다.’ 이 의미는 정확하게 개인 소유는 본질적으로 재산의 보편적 용도의 원칙에 기초한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6]라고 말하였다. “재산의 보편적 용도”의 원칙은 교황이 그의 “하나님은 사랑이라”[7]는 회람 서신의 2부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회람 서신에서 베네딕트는 교황 레오 13세, 요한 23세, 바울 6세, 요한 바울 2세의 글들에 담겨 있던 모든 재산의 보편적 소유 원칙을 전부 재가하였다.[8] 요한 바울 2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적 물건이든, 생산품이든 공통적으로 사용되도록 의도된 그러한 재산들에 접근할 수 있다”[9] 라고 언급한 것처럼 “모든 재산”은 자연에 있는 모든 재산 뿐만 아니라 모든 생산품을 포함한다. 바티칸 제2차 공의회 문서는 “모든 재산의 보편적 소유권”의 원칙을 그대로 고수하며 “만일 어떤 사람이 극심한 필요에 있다면 그는 자신의 필요를 위해 다른 사람의 부요로부터 획득할 권한이 있다”[10] 라고 강조한다.

사회주의적인 이 원칙이 법적으로 여러 나라들에 의해 더 많이 받아들여질수록, 많은 사람들, 특히 10억의 카톨릭 교도들은 궁핍한 자들을 위해 더 많은 희생을 해야 한다. 베네딕트 16세는 국가의 근본적인 기준으로서 모든 재산에 대한 가장 우선되는 권리는 필요에 따른 것이라는 교리를 제시하였다. 즉, 공동체의 재산의 몫이 각 사람에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내용은 국가나 세상 기관이 실행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공평을 추구하는 것은 국가의 근본적인 기준이어야 하며 공평한 사회 질서의 목표는 부가 원칙에 따라 공동체의 재산에서 각 사람의 몫이 보장되어야 한다”[11]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교황의 “공평한 사회 질서”의 목표는 반성경적이다. 이는 각 개인의 책임을 제거하고 또한 사람의 필요와 기회를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세를 파괴한다. 즉, 각 개인의 복지를 위해 하나님을 믿는 대신에 정권을 의지하도록 만드는 사상이다.  그러나 이 사상은 수 차례 세상 역사 가운데 실패로 증명되었다. 성경적으로 볼 때 정부의 책임은 자선이 아니라 시민 법을 집행하고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것이다.

바티칸 원칙이 각 나라에 적용될 때 비참한 결과들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카톨릭 주교의 1995년 목회 서신 “모든 사람을 위한 경제 공평”을 보면 똑같은 원칙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 서신은 “카톨릭 가르침에는 인간의 권리는 시민 및 정치 권한 뿐만 아니라 경제 권한도 포함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 ‘모든 백성은 생명, 음식, 옷, 집, 안식, 의료보장, 교육, 고용의 권한이 있다’” [12]라고 쓰여 있다. 이러한 정책은 성경적으로 지지 받을 수 없다. 오히려 이러한 복지 재분배는 도둑질에 속한다. 즉, 돈을 번 사람의 것을 무력으로 빼앗아 없는 자들에게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만 이 정책의 효과는 매해 카톨릭 자선 기관을 통해 세금 23억불이 재분배되고 있다. 이러한 재분배는 카톨릭에게 카톨릭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세력을 더욱 강화시킨다.

교황 선교의 주된 수단으로서의 카톨릭 경제 교훈

서방 세계를 향한 카톨릭 교회의 일반 정책이 잘 문서화되어있다. 예를 들어, 영국과 웨일스의 카톨릭 주교 컨퍼런스는 공개적으로 그들의 선교 목표는 현대 세계를 카톨릭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접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현대 세계를 접하면서 우리가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배경 가운데서 만나기 때문에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선교의 필요 요소이다. 특히 평민 계층에 우선을 두어야 한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특혜’와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은 특별한 우선 순위를 갖는다.”[13]

이 정책의 방법은 이 언급 안에 있다. 카톨릭의 “평민 계층 형성”의 우선 순위에 따르면 (즉, 평민들의 마음을 교황의 지시에 따르도록 함) 평민, 특히 가난한 자들은 모든 부가 모든 사람들 간에 균등하게 분할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철저하게 쇠뇌되어 카톨릭 믿음으로 넘어오게 된다. 카톨릭교회는 이 개념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특혜와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는 사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선교’는 가난한 자들에게 당장 효력을 나타낸다. 한편 로마 시스템에 이미 사로 잡힌 자들에게 이 개념은 구원을 얻고자 하는 그들의 가장 깊은 두려움을 향해 거짓된 안정감을 준다.

끔찍할만큼 부요한 로마 카톨릭 교회는 가난한 자들이 물질적인 평등을 얻을 수 있도록 상황에 따라 각 개인 및 정부들을 대항하거나 또는 지지한다.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6개의 인간의 권한 중에 하나라고 말한다. 미국 주교의 서신 “모든 사람을 위한 평등”은 이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카톨릭 가르침에는 인간의 권한이 시민권, 정치권 뿐만 아니라 경제권도 가지고 있다. … ‘모든 사람은 생명, 음식, 옷, 집, 안식, 의료보장, 교육, 고용의 권한이 있다.’”[14] 같은 문서 24문단은 카톨릭의 복음의 바탕을 설명한다. “회심은 평생의 과정이다.” 이 내용의 뜻은 “크던 작던 믿음의 모든 공동체는 공평을 지지하고, 이 일을 위해 세례, 공동 기도, 매일의 노력으로” 평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카톨릭 교도들은 선행은 구원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도우면서 개별적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공을 쌓도록 배운다. 따라서 교황은 ‘선교’에서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권한은 물질적 공평이라고 가르치며, 기관으로서 그들은 개인과 정부를 대상으로 ‘공평’을 위해 싸우고 있다. 외적으로 볼 때 그들의 ‘선교’는 ‘공평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보인다. 또한 그러한 물질적 사회 정책은 거짓 소망을 만들어 가난한 카톨릭 평민들을 사로 잡는다. 그러나 이 사상은 인간들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일하도록 하는 거짓 복음을 가르친다. 따라서 교황권은 물질적 사회 정책과 거짓 복음을 통해 선행을 장려하며, 이에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카톨릭 교도들을 중복해서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한 편에서는 주고 다른 편에서는 빼앗는다. 즉, 이 시스템에는 복음이 없기 때문에 사람의 죄책이 언제나 사람들에게 남아 있다. 그러므로 카톨릭 교회는 이미 사별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미사에 지불하라고 가르친다. 또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착한 일을 하는 일에 시간을 사용하라고 가르친다. 물론 결국 헛수고일 뿐이다. 아마 카톨릭 신자 하나가 세상을 떠나면 그의 친척들이 그를 위해 지불할 것이다. 카톨릭 시스템에서 가장 돈을 많이 모으는 기계는 죽은 자를 위한 미사다. 카톨릭 믿음의 시스템에 붙들리게 되면, 사람은 영적인 영역에서나 이 세상에서나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거짓 소망의 노예가 된다. 더욱이 카톨릭 신자들은 카톨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배운다. 그 이유는 카톨릭은 부요한 사람이던 가난한 사람이던 카톨릭이 죽은 자를 위해 미사를 지불할 것이라고 말한다.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을 보자. “처음부터 카톨릭 교회는 죽은 자를 기억하여 존귀하게 여겨왔다. 그리고 그들의 부족을 채우기 위해 기도드렸고 무엇보다 그들을 위해 성체 희생을 드렸다. 이는 죽은 자들이 순결하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15] 카톨릭 선교에 넘어간 자들은 이러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정리한 내용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

우리는 이제 우리 시대에 대해 적응해 볼 수 있는 성경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 첫째, 우리는 일반 학문 세계에서 교황권의 역사에 대한 실상과 또한 교황권이 각 나라들의 발전을 저해했다는 사실들이 심각할 정도로 무시되어 온 점을 관찰한다. 이름있는 저자들이나 역사가들 중에는 자신들의 학문 경력과 출판 활동에 장애가 될까 두려워 인류 역사 가운데 저지른 교황들의 살인마적 만행을 일반인들에게 알리려는 자들이 거의 없다. 또한 연구 및 출판을 통해 역사적인 지식을 정확하게 보존하고 전달하는 일들이 엄청나게 약해져 있다.[16] 더욱이 로마주의를 비평하는 오랜 책들이 대학 자료실, 카탈로그, 공립 도서관에서 사라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면밀하게 조사해보면, 종종 예수회 사제들과 오퍼스 데이(Opus Dei)와 같은 단체 내 정치적 영향이 있는 카톨릭 평신도들이 로마주의를 비평하는 자료들을 제거하는 도구들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놀랄만한 일들이 아니다. 성경을 통해 시대를 분변해 보면 이러한 일들은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요일 5:19) 임을 보게 된다. 또한 성경은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단 12:10)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악은 의도적인 것이며 그 수단과 방법을 통해 나타나는 세력과 비범함은 사탄적임을 안다 (고후 4:3-4). 모든 주권을 가지신 주 하나님은 사탄이 하나님과 대항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주의 백성들은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발생하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3). 처음부터 주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대대로 영원무궁히” (엡 3:21)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으셨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사람을 지으셨다. 주의 가장 지혜로운 계획은 아담과 인류가 타락할 때도 좌절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써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셨기” (계 13:8)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은 영원전부터 있었으며 아무 변함없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건을 다스리시며 일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신다” (엡 1:11). 사탄이던 교황 교회든 하나님을 대항하여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시 99:1)라고 기록한다. 오히려 그들의 악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크게 할 뿐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이다. 주의 은혜만으로 하나님은 지옥에 합당한 죄인들을 구원하시며 따라서 구속의 은혜의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한다. 더욱이 간교한 반 개혁주의 전략, 현대의 세속 정권 조작, 거짓 통합, 비성경적 경제 정책 등을 주관해 온 교황 로마는 단지 하나님의 영광의 마지막 목표를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주의 의의 나라를 세우는데 도구가 될 뿐이다. 우리는 진실로 아버지께서 주의 가장 뛰어난 지혜 가운데 교황 로마의 음모에 제약을 두시기로 하신 것에 감사한다. 교황 로마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계속적으로 거부함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한편, 주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 임하는 강력한 미혹에 속아서는 안될 것이다 (참조, 살후 2:8-11). 따라서 주의 백성들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워야”(유 3) 한다. 참된 신자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기록된 말씀에 온 맘을 다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지극히 거룩하시 하나님 앞에서 오직 은혜에 의해,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자들이며 따라서 오직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자들이다.


[1] 동시대에 살던 마틴 루터와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를 통찰력있게 비교한 와일리(J. A. Wylie)의 글들을 www.bereanbeacon.org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신비주의가 확장되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방법으로서 로욜라가 형성한 “형적 훈련”이 사용되고 있다. 와일리의 비교는 우리 시대에도 많이 관련된다.

[2] Sunday Telegraph 15th September 1991.

[3] Peter de Rosa, Vicars of Christ, the Dark Side of the Papacy, (New York:  Crown Publishers, Inc., 1988) p. 139.

[4] Ibid., pp. 271-273.  또한 다음을 참조하라. John Cornwell’s Hitler’s Pope:  The Secret History of Pius XII,  이 책에서 저자는 19세기에 로마 카톨릭 법이 국제적으로 어떻게 재구성되었는지 말한다. 마침내 카톨릭의 법은 1917년 교회 법전으로 최고로 완성되며 그 이후 그 법에 따르고 있다.

[5] www.zenit.org/article-24204?l=english 11/11/2008   예수회는 16세기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6] Encyclical, “Sollicitudo Rei Socialis”, John Paul II, Sect. 42.

[7] www.vatican.va/holy_father/benedict_xvi/encyclicals/documents/hf_ben-xvi_enc_20051225_deus-caritas-est_en.html

[8] Encyclical “Deus Caritas Est”, Sect. 27

[9] Encyclical, “Laborem Exercens”, 1981, John Paul II, Sect. 19.

[10] No. 64, “Gaudium et Spes”, Pastoral Constitution on the Church in the Modern World, 7 December 1965, Vatican Council II:  The Conciliar and Post Conciliar Documents, Austin Flannery, Gen. Editor (Northport, NY:  Costello Publ. Co., 1975) Para. 69.  Text is also on the Internet at: http://www.osjspm.org/cst/gs_cos2.htm

[10] Encyclical “Deus Caritas Est”, Sect. 26.

[11] Encyclical “Deus Caritas Est”, Sect. 26.

[12] National Conference of Catholic Bishops, www.osjspm.org/rights_and_duties.aspx   2/7/2007

[13] www.catholic-ew.org.uk/resource/eew/chapter4.doc Second Para  2/7/2007.

[14] www.osjspm.org/rights_and_duties.aspx   2/7/2007.

[15] Catechism Para 1032.

[16] 아브로 맨하튼의 책들과 같은 예외가 희귀하게 있기는 하다.